20210301 월요일, 비

빗소리 속에 잠깐 잠이 들었다. 깨어나니 춥고 몽롱해서 커피를 조금만 마시기로 했다. 드디어 데운 우유에 타먹는 1/4 카누에 은은한 싫증을 느끼고 코피코 커피를 꺼냈다. 80도씨의 물 120ml에 잘 저어주면 된다. 달고 따뜻한 커피로 몸을 데우니 출수 후 방카에서 먹는 컵라면 국물이 떠올랐다. 진짜 맛있는데. 다이빙하며 느꼈던 강렬한 좋은 느낌들은 깊이 각인이 되어서 비슷하게 기분이 좋을 때마다 연이어 떠오른다. 그러고 보면 샤워하면서도 오늘은 꼭 다이빙하러 가는 날 아침 같다고 생각했다. 졸려서 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은데, 굉장히 즐거운 일들이 있을 거 같다는 기대감에 머리의 투정을 묵살하고 그냥 빨리 씻을 때의 기분. 습도가 높아서인지, 기억나지 않는 좋은 꿈이라도 꿨던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은 그런 무드다. 다이빙이 그렇게 깊고 충만한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알 수 없다. 몸 입장에서는 죽다 살아난 느낌이라 기분 좋고 강렬하게 기억되는 걸까.. 하여간 내가 볼 땐 약보다 나은데 아무도 안믿는다. 특히 약보다 낫다는 워딩을 쓰면 더 그런다. 살면서 샤워를 만 번은 했을텐데 샤워를 할 때면 늘 했던 샤워들보다 수영장이나 다이빙샵 컨테이너, 목욕탕에서 했던 샤워가 더 자주 떠오른다. 물줄기 밑에서 눈을 감으면 모든 샤워장이 꿈 속 처럼 연결되어있다.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자주 행복할 것 같다.

3월이다. 아침에 주황색 콩나물국을 먹으며 벌써 1년의 1/6이 지났어, 너무 빠르다는 투로 말했지만 두 달 간 계획에 맞춰 정독한 책이 4권이고 다른 마감도 대체로 잘 지키고 있으니 괜찮게 보내고 있는 것 같다. 점심 먹고는 오빠 생일 선물을 골랐다. 제발 가슴팍 사이즈가 넉넉한 라지여서 오빠가 앞을 여미고 다닐 수 있길.. 며칠 전엔 엄마 볼 일본어 기초 교재도 골랐다.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아빠에게 영양제를 꺼내 준다. 예전엔 그런 것들이 부담스럽고 어색하고 신경쓰였는데, 요즘은 가족들에게 먼저 나서서 살갑게 구는 일이 즐겁고 많이 편해졌다. 내가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, 지난 몇 년간 타인과 친밀하게 지내는 일, 귀애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익숙해졌고, 그것을 가족에게 받기 전에 먼저 행할 만큼 육체적, 정신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. 물론 그에 앞서 너무 많은 조건들 - 함께 할 넉넉한 시간, 공간, 아버지의 변화 등등 - 이 충족되기도 했다.

원가족과 진심으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 마음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는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로 모를 것 같다. 반대로 말하면 원가족과의 불화가 자신에게 얼마나 항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, 화해해보지 않았다면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다. 나의 경우, 영향 하에 있다는 것조차 또렷하게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. 그 변화를 아직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, 한 가지만 꼽자면 아버지가 사과한 날 나는 그 이전의 모든 날들보다 좀 더 잘 잤다. 그리고 가족들과 정말 '가족처럼' 지내기 시작하면서, 내 마음 속에 항상 있었던 '가족이 되었으면 좋겠는 사람을 찾아 헤매기'를... 직시하고 핸들하는게 점점 쉬워졌다. 힘든 가족의 구성원으로 산다는 건 직접 겪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잘 짜여진 지옥이어서, 지레 짐작으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. 당장 맘대로 화해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절연하는 편이 훨씬 나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. 하지만 불화나 조화나 비등하게 힘든 선택인 사람들에게는, 내 경우는 알고보니 조화를 선택하는 게 좀 더 나은 케이스였다고, 그 정도는 말하고 싶었다.

자신에게 중요한, 그러나 미해결된 어떤 문제,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다. 문제는 그게 너무 오래되면, 그 문제가 남긴 흔적과 자신을 구분하는 걸 잊게 된다. 그리고 어떤 자세나 습관이 되어 굳어진다.
주로 원망, 미움, 불신, 죄책감 같은 감정들이 특정한 행동의 형태로 남는다. 이유조차 잊은 채 자기를 벌주는 버릇만이 남아 자신을 괴롭힌다거나, 관계 없는 타인에게도 쉽게 날을 세우는 버릇이 생기고, 새로운 모임에 가도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고 침울한 모습이 이어져서 누군가 왜 그러냐 물으면 나는 '원래 조용한 성격이다' 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거나.

나는 지난 해에 수개월간 밥을 잘 먹지 못했다. 소화가 잘 안됐고 아픈 곳이 많았으니 그저 건강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. 근데 우연히 해묵은 문제의 일부가 해소되었는데, 그때 이상하게 '나 이제 행복해도 되는구나, 즐거워도 되는구나' 그런 생각이 들었다. 그제야 그동안 내가 자책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. 식욕도 돌아왔다. 또 다른 오래된 큰 문제로부터 분리된 날 밤에는, 자려고 생각한 시간에 잠이 들었고 아침이 될 때까지 깨지 않았다. 정말로 정말로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.

오랜 시간 문제상황 안에 있으면, 자신이 문제상황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고, 설령 인정해도 자신은 이제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. 그 문제로 인해 자신의 마음 어딘가가 구겨져있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.

문제가 없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도 어렵다. 해당 문제가 없는 타인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이 따르면 좀 쉽다. 혼자서 분투할 때보다 좀 더 빨리 믿을 수 있게 된다. 지금 이 상황은 상황일 뿐 내가 아니고, 나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.